왜 ‘술’인가? – 헤밍웨이 삶과 문학의 술이 된 이유
헤밍웨이를 이야기하면서 술을 빼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단순히 술을 좋아한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글 속에 술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인물이었다. 흔히 ‘마초 작가’로 불리며 남성적 상징으로 회자되는 그는, 전쟁의 공포, 인간의 고독, 생의 허무와 맞서는 방법 중 하나로 술을 선택했다. 그의 소설과 수필 속에는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며, 그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의 일면이었다. ‘술은 헤밍웨이의 글에서 등장인물이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현실을 견디는 일종의 방패였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헤밍웨이가 술을 즐기게 된 배경은 그의 방랑적인 삶과도 맞닿아 있다. 젊은 시절의 유럽 체류, 전쟁 특파원으로서의 활동, 쿠바에 머무는 동안 접한 라틴 문화는 그에게 다양한 종류의 술을 경험하게 했다. 그는 단지 마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술을 사람과 장소, 시간과 기억의 매개체로 활용했다. 그의 글에서 인물들은 위스키나 와인을 마시며 속마음을 털어놓고, 모히또 한 잔에 잊지 못할 순간을 새긴다. 이처럼 헤밍웨이에게 술은 현실을 직면하는 방식이자, 문학적 장치를 넘어 삶 그 자체로 존재했다.
압생트와 파리의 예술가들 – 녹색 요정에 매혹된 시절
1920년대 파리, 몽파르나스의 카페 문화는 당시 젊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공간이었다. 헤밍웨이 역시 이 시기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일원으로 파리에서 활동하며,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제임스 조이스 등과 어울렸다. 그들이 즐겨 마신 술 중 하나가 바로 압생트(absinthe)였다. 프랑스에서 '녹색 요정'이라 불리며 시인과 화가들에게 사랑받았던 압생트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환각과 창조성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헤밍웨이도 이 독특한 허브 술에 매혹되었고, 그의 몇몇 작품 속에서 압생트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도구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는 단편소설 《살인자들(The Killers)》이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다. 이 작품들 속에서 인물들이 마시는 압생트는 도피이자 마비의 수단이며, 동시에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압생트의 '잔혹하면서도 감각적인' 효과를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압생트 사랑은 마치 19세기 후반 보들레르나 랭보의 감성과도 닿아 있었고, 그 시대 파리의 향취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하지만 1915년 프랑스에서 압생트가 금지되면서 그 문화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헤밍웨이는 쿠바, 스페인, 미국 등지에서 다양한 술로 관심을 옮기게 되지만, 파리에서의 압생트 경험은 그의 젊은 시절과 문학적 정체성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녹색 요정은 사라졌지만, 그 잔향은 헤밍웨이의 문학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쿠바의 햇살과 모히또 – 『노인과 바다』 속 바의 풍경
헤밍웨이가 쿠바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자주 찾던 장소 중 하나가 바로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라는 작은 바였다. 이곳은 모히또(Mojito)의 탄생지로도 유명한데, 헤밍웨이는 "나는 플로리디타에서는 다이키리를, 보데기타에서는 모히또를 마신다"라는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이 말은 단지 그가 어떤 술을 마셨는지를 넘어, 각각의 장소와 술에 담긴 의미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특히 쿠바의 따뜻한 햇살, 소박한 거리 풍경, 자유로운 라틴 문화는 그에게 모히또라는 칵테일을 ‘작은 해방’으로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히또는 럼, 라임, 민트, 설탕, 탄산수로 이루어진 가볍고 상쾌한 술로, 쿠바의 무더위를 날려주는 대표적인 칵테일이다. 헤밍웨이의 문학 속에서는 모히또가 직접 등장하는 경우는 적지만, 『노인과 바다』처럼 쿠바의 정서가 짙게 깔린 작품에서는 그가 경험한 삶의 배경으로 술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소설 속 노인의 절제된 감정, 자연과의 사투,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은 단순한 음주 장면을 넘어서 술이라는 도구가 품을 수 있는 철학을 보여준다.
쿠바 시절의 헤밍웨이는 마치 바다와 글, 술이 삼위일체처럼 결합된 존재였다. 플로리디타 바에는 오늘날까지 그의 동상이 남아 있고, 그가 자리에 앉았던 곳은 ‘헤밍웨이 스팟’으로 불린다. 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면, 술 한 잔을 넘어 한 시대의 감성과 미학을 경험하는 여행이 된다.
위스키, 진, 데킬라 – 글 속에 흐르는 또 다른 술들
헤밍웨이가 사랑한 술은 압생트와 모히또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문학과 삶에는 위스키, 진, 데킬라 등도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며, 그 자체로 헤밍웨이식 세계관을 구축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그의 인생 후반부에 해당하는 미국과 스페인 시절, 전쟁과 우울증, 가족사 등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 속에는 더 강하고 건조한 술이 어울렸던 듯하다.
위스키는 그의 많은 작품에서 고독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술로 등장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는 게릴라 전사들이 전투 전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등장하고,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전쟁의 허무와 연인 사이의 이별을 위스키 한 잔으로 이겨내려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헤밍웨이의 위스키는 쾌락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기 위한 방편이자 인간적 허무를 견디는 수단으로 묘사된다.
진(Gin)은 특히 냉소적인 유럽 지식인 캐릭터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데, 냉정한 대화 속에서도 잔을 비워가며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많다. 데킬라는 멕시코나 라틴 지역을 배경으로 한 글에서 나오며, 고열의 태양과 이국적 풍경 속에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이처럼 헤밍웨이의 술들은 단지 마시는 알코올이 아닌, 등장인물의 성격과 시대, 문화, 정서를 압축한 상징체계로 읽힌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술을 문학의 언어로 치환하는 데 능숙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문학 속 술의 역할 – 감정, 고독, 삶의 메타포
헤밍웨이의 작품에서 술은 단지 배경이나 습관의 일부가 아니라, 감정과 인간관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메타포로 작동한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말을 아끼고 감정을 숨기는 경우가 많지만,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는 그 속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는 독자에게 감정의 흐름을 파악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이며, 동시에 '말하지 않음'으로 표현하는 헤밍웨이 특유의 빙산 이론(Iceberg Theory)과도 맞물린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는 인물들이 계속해서 술을 마시며 대화하고 갈등을 겪는 장면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술자리는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전쟁 이후의 무기력과 정체성 상실, 관계의 부조화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마찬가지로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비극적 로맨스를 겪는 주인공이 술에 기대어 현실을 마주하고, 사랑을 이어가려는 모습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술은 이처럼 헤밍웨이 문학 속에서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인간 내면을 드러내는 창구 역할을 한다. 등장인물들은 술잔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침묵하며,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고통이나 욕망을 드러낸다. 술은 무너지기 쉬운 인간을 지탱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작용한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헤밍웨이는 감정의 섬세한 결을 그려내고,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오늘, 헤밍웨이처럼 마신다면 – 여행지와 술집 추천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는 헤밍웨이의 자취를 따라가는 '문학 여행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향하는 곳 중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쿠바의 플로리디타(El Floridita)와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다. 이 두 곳은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으로, 지금도 그가 즐겼던 다이키리와 모히또를 맛볼 수 있는 명소다. 아바나의 거리에서 그의 조각상이 있는 바에 앉아 한 잔을 마시면, 마치 작가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유럽에서는 파리의 클로즈리 데 릴라(La Closerie des Lilas)와 라 로통드(La Rotonde)가 헤밍웨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카페로 유명하다. 압생트를 마시던 테이블, 노트를 펼쳐 아이디어를 메모하던 자리 등은 지금도 예술적 영감을 찾는 이들에게 성지처럼 여겨진다. 미국 플로리다 키웨스트에는 그의 전용 저택이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도 헤밍웨이가 애용했던 술과 삶의 흔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헤밍웨이가 마셨던 술은 단지 음료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 감정을 함께 품은 문화의 일부다. 우리가 그의 흔적을 따라 술을 마신다면, 단순한 음주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체험하는 것이 된다. 헤밍웨이의 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문학을 넘어선 그만의 철학과 감성,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마주하게 된다.
'세계 주류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백에서 김삿갓까지, 시인들의 술 이야기 (0) | 2025.12.07 |
|---|---|
| (와인을 사랑한 문인들) 피츠제럴드, 보들레르, 무라카미의 술 취향 (0) | 2025.12.05 |
| 도구에 따라 더 맛있는 술, 위스키를 맛있게 먹는 방법 (글라스 종류 및 디캔더 사용법) (0) | 2025.12.03 |
| 영화 속 위스키의 등장과 역할 (제임스 본드, 매드맥스, 킹스맨 등, 느와르, 미국 영화, 일본 영화) (0) | 2025.12.02 |
| 스카치? 버번? 위스키 종류별 차이와 선택법 (나라별 위스키의 특징과 차이) (0) | 2025.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