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크와 우조, 지중해에서 닮은 듯 다른 두 전통주
터키의 라크(Rakı)와 그리스의 우조(Ouzo)는 모두 아니스 향을 가미한 증류주라는 점에서 매우 비슷한 외형과 풍미를 가집니다. 두 술 모두 물이나 얼음을 섞으면 투명한 액체가 뿌옇게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언뜻 둘이 같은 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술은 기원도, 즐기는 방식도, 맛의 뉘앙스도 분명하게 다릅니다. 각각 지중해의 동쪽과 서쪽을 대표하는 전통주로 자리 잡은 라크와 우조는, 서로 다른 국가의 문화와 정체성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라크는 대체로 포도나 사탕무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든 고도수 술이며, 도수가 45도에 달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여기에 아니스를 넣어 향을 입히고, 일부 고급 라크는 오크통에서 숙성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우조는 주로 포도주 찌꺼기나 곡물 알코올에 다양한 허브와 향신료를 더해 증류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둘 다 아니스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지만 아니스의 향이 뚜렷한 라크와 다르게 우조는 계피, 펜넬, 카다멈 등의 향도 함께 배어 있어 복합적인 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마시는 순간에도 분명하게 드러나며, 라크는 진하고 묵직한 뒷맛이 오래 남는 반면, 우조는 보다 상큼하고 밝은 인상을 줍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역사적으로도 많은 교류를 했었기 때문일까요? 서로 닮은 술을 가진 두 나라의 라크와 우조는 그 유사성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비교 대상이 되어 왔고, ‘어느 쪽이 원조냐’는 다소 민감한 논쟁을 낳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이 닮은 듯 다른 술들이 각각의 문화와 테이블에서 이 술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시는 방식과 분위기의 차이
라크와 우조는 그 맛만큼이나 마시는 방식에서도 고유한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라크는 단독으로 마시기보다는 반드시 물이나 얼음을 넣어 희석해 마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렇게 물과 만나면 술이 뿌옇게 변하면서 라크 특유의 ‘사자의 우유’라는 별칭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마시는 사람에게 준비된 의식을 치르는 듯한 감각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적·감각적 요소는 라크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반면 우조는 보다 가볍게, 정제된 방식으로 즐기곤 합니다. 그리스에서는 식사 전이나 간단한 대화 자리에서 작은 잔에 우조를 따르고, 물을 살짝 섞거나 얼음만 넣어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터키의 라크 문화가 천천히 이어지는 긴 저녁 식사와 대화, 가족과 친구 간의 진지한 교류를 떠올리게 한다면, 우조는 바닷가 작은 바에서 가벼운 음악과 함께 떠들썩하게 웃으며 즐기는 분위기를 상징합니다.
문화적으로도 두 술은 그 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일상 리듬을 반영합니다. 라크는 ‘라크 무하벳’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술을 마시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뜻합니다. 이 시간은 단순한 음주를 넘어서 감정의 흐름과 인간관계의 밀도를 키워주는 역할을 하죠. 우조 역시 마찬가지로 공동체 안에서 함께 마시는 술이지만, 그 톤은 보다 밝고 명랑하며, 일상 속의 휴식과 축제에 가깝습니다. 이처럼 술 한 잔에도 각기 다른 삶의 리듬이 스며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음식과의 궁합, 술상 위의 이야기
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식입니다. 라크와 우조 모두 강한 아니스 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독으로 마시기보다는 음식과의 페어링이 중요합니다. 터키에서는 라크를 마실 때 메제(Meze)라 불리는 소형 요리들이 함께 차려집니다. 가지 무침, 병아리콩 샐러드, 절인 고등어, 치즈와 멜론 같은 조합은 라크 특유의 향을 부드럽게 감싸주며, 술과 음식이 서로의 맛을 더욱 살려줍니다. 특히 라크와 짭조름한 흰 치즈는 클래식하고 대표적인 궁합으로, 그 조화를 경험해 보면 왜 이 조합이 오랜 세월 사랑받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우조 역시 음식과 함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우조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는 해산물이 꼽히며, 특히 문어구이, 칼라마리 튀김, 올리브, 페타 치즈는 우조 테이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합입니다. 기름진 해산물 요리를 우조의 향긋하고 청량한 향이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입 안에 남는 맛의 밸런스를 조절해 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의 햇살 아래에서 먹는 신선한 토마토와 허브를 곁들인 샐러드에 우조를 곁들이면, 그야말로 여름 그 자체를 마시는 기분이 듭니다. 이처럼 음식과 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맛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 라크와 우조의 진정한 매력입니다.
여행자의 눈으로 본 라크와 우조
라크와 우조, 두 술을 경험한 여행자라면 이 술들이 두 나라 사람들의 성향과 문화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컨대 터키에서 라크를 마시는 자리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집니다. 서둘지 않고, 음식을 나누며, 감정을 이야기하고, 누군가의 삶에 대해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라크는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의 우조는 또 다릅니다. 그리스에서는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바닷가 타베르나에 앉아 해산물과 함께 우조를 마시는 풍경이 일상입니다. 친구들과 웃으며 건배하고, 짧은 대화 속에서도 행복을 나누는 그 순간, 우조는 삶의 축제를 상징합니다. 그 술잔 속에는 햇살, 바람, 사람들의 표정이 담겨 있고, 여행자는 어느새 그 삶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라크와 우조는 ‘누가 먼저였는가’를 따지기보다, ‘누구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가’에 집중할 때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집니다. 한 모금의 술에 담긴 문화, 정서,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그것입니다. 다음에 터키나 그리스를 여행하게 된다면, 명소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그곳 사람들과 함께 라크나 우조 한 잔을 기울이는 경험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여행은 결국 기억의 잔에 남는 풍미와 같습니다. 그리고 라크와 우조는, 그 잔을 한껏 채워주는 술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