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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그라파(Grappa)의 기원과 전통 방식의 진화

by nottheendwrite 2025. 10. 23.

이탈리아 그라파(Grappa)의 기원과 전통 방식의 진화

작고 검소한 시작, 그라파의 기원

 이탈리아 북부의 언덕과 계곡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포도를 수확해 와인을 만들어왔습니다. 와인을 만들고 난 후 버려지기 일쑤였던 포도 껍질과 씨앗, 줄기 같은 부산물, 즉 '포마스(pomace)'를 활용해 다시 증류해 마신 것이 바로 그라파의 시작입니다. 초기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자급자족을 위해 만든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라파는 이탈리아의 식문화 속에 깊숙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토, 프리울리, 트렌티노 지역은 특히 그라파의 명산지로 꼽히며, 지역 특유의 포도 품종과 기후, 숙성 방식 등이 어우러져 저마다 다른 풍미를 지닌 그라파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탈리아 정부와 유럽연합 차원에서 '그라파'라는 명칭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일정한 지역과 재료, 제조 방식에 따라 인증을 받는 경우에만 해당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라파는 더 이상 '남은 것을 재활용한 술'이 아닌, 정제된 장인의 결과물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증류 방식과 숙성의 진화

 전통적인 그라파는 구리 솥에 불을 때어 포마스를 천천히 증류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지만, 술에 자연스러운 풍미와 깊이를 부여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위생과 품질 관리를 위해 진공 증류 방식이나 자동 온도 조절 시스템 등을 도입한 증류소들이 늘어났고, 덕분에 맛의 다양성과 품질의 일관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또한 예전에는 투명하고 강한 도수의 '화이트 그라파'가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오크통에서 수년간 숙성시킨 '숙성 그라파'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나무통에서 숙성되면서 술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바닐라·견과류·허브 같은 복합적인 향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특정 품종의 포도만을 사용한 '단일 품종 그라파(monovitigno)'도 고급 제품군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마치 와인을 고를 때처럼 그라파의 세계에서도 포도 품종에 따라 맛을 선택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음식과 문화 속의 그라파

 이탈리아에서 그라파는 단순한 술이 아닌, 식사 문화의 한 장면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보통은 풍성한 식사를 마친 뒤, 입안을 정리하거나 소화를 돕는 의미로 그라파를 한 잔 곁들입니다. 그라파의 알싸하고 따뜻한 맛은 느긋한 대화와 여운을 남기는 데 제격입니다. 특히 가족 모임이나 친구와의 만찬 자리에서 그라파를 돌려 마시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그라파는 단순히 알코올이 아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여겨집니다. 또한 최근에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디저트나 진한 치즈, 초콜릿과 페어링하는 방식으로도 제공되며,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칵테일 재료로도 점차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라파는 이렇게 전통과 현대를 동시에 품으며 변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대 재해석과 글로벌 무대에서의 그라파

 그라파는 이제 단지 이탈리아 농가에서 만들어지는 소박한 증류주가 아닙니다. 고급 병 디자인, 브랜드 라벨링, 숙성 연도에 따른 분류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고급화되고 있으며, 세계적인 리큐르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특히 숙성된 프리미엄 그라파는 위스키 애호가들에게도 호평을 받으며 수집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이탈리아 곳곳에서는 그라파 박물관, 체험 증류소, 시음회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현지 문화를 이해하고 직접 참여해보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라파는 단순한 술을 넘어 ‘이탈리아 지역성과 손맛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전통주로서 자부심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조지아의 차차와 이탈리아의 그라파

 조지아의 차차와 이탈리아의 그라파는 모두 와인을 만든 후 남는 포마스를 활용해 만들어지는 증류주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술은 각기 다른 문화와 방식에서 비롯된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차차는 조지아의 농촌 문화와 가정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대개 포도 껍질과 줄기, 씨를 그대로 발효시켜 비교적 강한 도수로 증류합니다. 반면, 그라파는 초기에는 소박한 이미지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세련된 증류 방식과 숙성 기술이 더해져 고급 증류주로 발전해 왔습니다. 또한 차차는 허브나 과일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지역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고, 그라파는 품종별, 숙성 연도별로 구분하는 정제된 분류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문화적 접근도 다릅니다. 차차는 공동체 중심의 소박한 자리에서 마시는 경우가 많고, 그라파는 개인적인 여유를 즐기거나 디저트와 곁들여 맛보는 등 보다 정제된 경험으로 소비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술은 닮은 듯하면서도 각자의 역사와 정체성 속에서 뚜렷한 차이를 갖고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위한 그라파 한 잔

 이탈리아를 여행한다면 단지 유명한 관광지만 둘러보는 것보다, 지역 증류소나 작은 바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그라파를 즐겨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베네토 지역의 브레사노 델 그라파 같은 도시에서는 고풍스러운 바와 증류소에서 다양한 종류의 그라파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며, 그라파가 지역 이름에 붙을 만큼 지역 자체가 술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라파를 마실 때는 너무 차갑게 하지 말고, 약간 상온에 가까운 온도로 마시면 향미가 더 잘 느껴집니다.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입안에서 퍼지는 맛과 향을 음미해보세요. 과연 어떤 포도 품종으로 만들었는지, 어떤 숙성 과정을 거쳤는지를 생각하며 마신다면 그라파 한 잔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이탈리아 땅의 기억이 되어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