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같지 않은 술, 황주를 처음 마셨던 날
몇 해 전, 상하이 출장 중 한 현지인 지인의 추천으로 ‘황주(黃酒)’라는 술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노란 술?’이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술이라 하면 맑고 투명하거나, 적어도 맥주처럼 노르스름한 색을 떠올리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잔에 따르는 순간, 진한 호박빛의 액체는 색깔부터 기존에 알던 술들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을 때 느껴진 그 독특한 감칠맛은, 그저 ‘단순한 술’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풍부한 경험이었습니다. 황주는 그렇게, 평소 술을 즐겨 마시지 않던 제게도 단박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귀국 후에도 종종 생각날 만큼 기억에 남는 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황주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이 술이 단순한 지역 술이 아니라, 중국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응축된 전통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황주가 어떤 술인지,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셔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지를 함께 풀어보려 합니다.

이름보다 깊은 술 황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노란 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황주(黃酒)는 쌀, 기장, 밀, 보리 등 곡물을 발효시켜 만드는 중국 고유의 전통주로, 실제 색깔은 진한 갈색에서 호박빛에 가까우며, 약간의 점성이 느껴질 만큼 농도가 있는 편입니다. 도수는 보통 15도 전후로, 증류주보다는 낮고 와인보다는 높은 수준입니다. 황주는 맥주나 소주, 와인과 달리 증류하지 않고 발효만으로 만들어지는 술입니다. 이 때문에 ‘곡주(穀酒)’ 또는 ‘양주(釀酒)’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황주는 ‘소흥주(紹興酒)’로, 이름 그대로 저장성 소흥 지역에서 생산되는 술입니다. 소흥주는 황주의 대표 주자로, 맛, 향, 역사, 생산 규모 면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죠. 황주의 원료는 지역과 제조법에 따라 달라지지만, 전통적으로는 찹쌀, 누룩, 물 세 가지가 핵심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자연적인 발효 과정을 거쳐 술이 완성되기까지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긴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황주는 마치 ‘동양의 셰리 와인’이라고도 불립니다.
3,000년을 넘어 이어진 황주의 역사
황주의 기원은 무려 기원전 2,000년 경 상나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문헌에 따르면, 중국 고대인들은 이미 이 시기부터 쌀을 발효시켜 술을 빚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의례나 제사에 사용되는 제례주로도 황주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황제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도 이 술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에는 황주의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해졌고, 이때부터 다양한 지역에서 각기 다른 스타일의 황주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도 황주를 즐겨 마셨다고 하며, 그의 시에는 술에 대한 애정이 종종 담겨 있습니다. 그중 소흥(紹興) 지역은 황주의 명맥을 가장 오래도록, 그리고 정통적으로 이어온 지역입니다. 저장성에 위치한 소흥은 깨끗한 물과 쌀이 풍부한 곳으로, 황주 제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전통 방식으로 황주를 빚는 장인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 노하우는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황주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문화가 있는데, 황주가 단순한 식용 술을 넘어 약용으로도 활용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따뜻한 성질을 지닌 황주는 혈액 순환을 돕고, 위장을 따뜻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중국 민간에서는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데운 황주에 계란을 풀어 마시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몸에도, 마음에도 따뜻함을 주는 술인 셈입니다.
황주를 황주답게 마시는 방법
황주는 그 특성상 그냥 따라 마시는 술이 아니라, ‘마시는 방식’이 중요한 술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데워서 마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특히 날씨가 쌀쌀한 계절에는 40~50도 정도로 황주를 데워 마시면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며 은은한 단맛과 곡물의 깊은 향이 살아납니다. 이 방식은 마치 일본의 사케와도 비슷하지만, 황주는 사케보다 더 농도 있고 묵직한 맛을 지녔기 때문에 따뜻하게 마실 때 풍미가 훨씬 풍성해집니다. 물론 여름철처럼 더운 날에는 냉장 보관한 황주를 시원하게 즐기기도 합니다. 다만 너무 차가우면 향이 죽기 때문에, 실온 정도에서 가볍게 마시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잔은 유리잔보다는 도자기 잔이나 백자 잔처럼 두께감 있는 잔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유는 술의 온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보통 ‘작은 도자기 주전자’에 황주를 담아 데우고, 소형 잔에 따라 마시는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또한 황주는 음식과의 궁합도 중요한 술입니다. 일반적인 안주보다는 기름기 있는 중식 요리나,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 훈제 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개인적으로는 베이징 덕이나 오향장육 같은 메뉴와 함께 마셨을 때 그 풍미가 배가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중국식 만두나 두부요리, 간장 양념이 진한 생선찜과도 훌륭한 궁합을 자랑합니다. 황주의 맛은 단맛과 짠맛, 그리고 미묘한 산미와 구수함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간이 센 음식보다 은은한 요리와 더 좋은 조화를 보일 때도 많습니다. 술 자체가 하나의 요리처럼 느껴질 만큼 풍성하기 때문에, 때로는 간단한 견과류나 마른안주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술상이 됩니다.
한국에서 황주를 즐기는 방법
국내에서도 과거에 비해 황주를 찾기가 훨씬 쉬워졌는데요, 대형마트나 수입주류 전문 매장, 그리고 온라인 전통주 쇼핑몰 등에서도 ‘소흥주’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황주 제품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제품에 따라 당도나 발효 기간, 숙성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만약 황주를 처음 접하신다면 ‘3~5년 숙성 제품’을 추천드립니다. 너무 오래 숙성된 제품은 초심자에게는 다소 무거울 수도 있습니다. 황주는 개봉 후 보관도 중요한데, 냉장 보관을 추천드리며 가능한 한 2주 이내에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오픈 후에는 산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향이나 맛이 급격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와인과 마찬가지로 개봉 즉시 진한 향을 맡고 한 잔 정도는 ‘공기 접촉 후 맛의 변화’를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혹시 황주를 혼자 마시기 부담스럽다면, 중식당이나 전통주 전문 바에서 잔술로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특히 최근엔 서울, 부산, 제주 등지에 아시아 전통주를 테마로 한 주점들이 생겨나면서, 사케나 막걸리뿐 아니라 황주도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받고 있습니다.
술 한 잔에 담긴 오래된 시간
황주는 처음 접하면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색도 진하고, 향도 강하며, 마시는 방식도 여느 술과 다릅니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마셔보면 그 고유한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는 술입니다. 단순한 알코올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오랜 시간과 정성, 문화의 흔적이 그 깊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쌀쌀해지는 날씨, 여유가 필요한 저녁에 조용히 잔에 황주 한 모금 따르고, 은은한 음악과 함께 음미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입 안에서 퍼지는 그 부드러움과 따뜻함은 단순한 술 이상의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