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서 만난 술의 기억
동남아 여행을 하다 보면, 때론 그 지역 음식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있습니다. 낯선 병이나 투박한 플라스틱 병에 담겨 시장 구석에 놓인 술을 따라주며 소박하게 웃는 현지인의 모습입니다. 라오스를 여행했을 적, 작은 시골 마을에서 처음 ‘라오라오’를 마셨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지만 해가 지고 땅이 식어갈 무렵에 마신 라오라오 한 잔은 이상할 만큼 기억에 오래 남더군요. 그 이후로는 다른 나라에서도 현지의 술을 일부러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태국,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의 전통주와 거기에 담긴 문화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술들이지만, 그만큼 색다른 지역색과 전통을 지니고 있기에 흥미로운 술들을 지금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서민적 매력을 가진 태국의 전통주 ‘라오카오’
먼저 소개할 태국의 전통주는 라오카오(Lao Khao)입니다. 직역하면 ‘흰 술(White Liquor)’이라는 뜻인데요, 쌀이나 찹쌀을 발효한 후 전통적인 증류 방식으로 만든 도수 28~40%의 무색 증류주입니다. 현지에서는 도시보다는 시골 마을에서 더 흔히 접할 수 있으며, 시장에서는 플라스틱 병에 담겨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기도 합니다. 보통 식사 전후로 한두 잔씩 나누며 마시고, 결혼식, 장례식, 축제와 같은 마을 행사에서도 함께 마시며 즐거움을 나누기도 합니다. 라오카오는 최근 태국 내에서 소규모 양조장을 통한 ‘크래프트 라오카오’ 생산이 증가하면서 전통주 시장에서도 다양성과 현대적 감각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허브나 열대 과일을 첨가한 새로운 제품도 출시되고 있어 관광객이나 젊은 세대에게도 점차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와 삶에 스며든 라오스 전통주 ‘라오라오’
라오스의 전통주 ‘라오라오(Lao Lao)’는 '라오 사람들의 술’이라는 뜻을 가졌는데요, 이 술은 찹쌀을 발효한 후 직접 증류해 만드는 고도수 주류로 대개 알코올 도수는 30~50% 사이로 꽤 강한 편입니다. 특히 시골 지역에서는 직접 집에서 술을 빚어 이웃과 나누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결혼식이나 명절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는 라오라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신랑 신부가 함께 마시는 건배 의식이 따로 전통적으로 내려 올 정도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라오라오를 ‘사랑의 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정부의 전통산업 육성 정책에 따라 소규모 양조장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으며 관광객을 위한 라벨 디자인 개선과 위생 인증 등으로 라오라오 역시 브랜드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단, 비공식 증류주의 경우 품질 관리가 미흡할 수 있으므로 여행 중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민속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미얀마 전통주 ‘타운예’
미얀마의 전통주 ‘타운예(Taung Yay)’는 한국의 막걸리와도 비슷한 성격을 가진 술입니다. 막걸리처럼 쌀을 발효시켜 만든 이 술은 도수가 약 10도 내외로 낮은 편이며, 살짝 시큼한 맛과 약한 탄산감이 어우러져 목 넘김이 부드럽고, 마시기에도 부담이 없습니다. 타운예는 미얀마 전역에서 쉽게 접할 수 있으며, 특히 친주(Chin State)나 샨주(Shan State)와 같은 고산 지대에서는 민속 축제나 제례 의식에서도 활용됩니다. 특별한 행사 외에 일상에서도 많이 마시는 술로, 장마철이나 비 오는 날 저녁에 노점 식당에서 따뜻한 국수 한 그릇과 함께 곁들이는 모습을 현지에서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위생적인 유통을 위해 공장에서 병입 된 타운예도 일부 유통되고 있지만, 여전히 시장에서는 투박한 플라스틱 병에 담긴 수제 타운예가 더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술인 베트남의 ‘루우’와 ‘루우쩌’
베트남에는 매우 지역적인 특성을 지닌 전통주들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루우(Rượu)’, 특히 ‘루우깟(Rượu gạo)’과 ‘루우쩌(Rượu cần)’입니다. 루우깟은 쌀을 발효·증류해 만든 도수 30~40% 내외의 쌀소주로, 주로 북부 베트남에서 자주 소비되고, 루우쩌는 베트남 중부의 소수민족 지역, 특히 떠이응우옌(Tây Nguyên) 고원에서 유래된 술로, 찹쌀을 발효한 술을 큰 항아리에 담고, 여러 명이 대나무 빨대를 꽂아 함께 마시는 형식입니다. 루우쩌는 알코올 도수가 일반적으로 15~25% 수준이며, 공동체 행사나 제례에서 사람들이 한 항아리를 둘러싸고 술을 나누는 의식이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를 반영하여 최근에는 루우쩌를 재현한 체험형 관광 상품이 운영되기도 하고, 소규모 공방에는 현대적인 병 디자인으로 출시한 제품들도 생기고 있습니다.
발리의 종교와 문화가 담긴 ‘아락 발리’
인도네시아 발리 지역의 대표 전통주인 ‘아락 발리(Arak Bali)’는 야자수 수액 또는 쌀을 발효해 만든 증류주입니다. 알코올 도수는 대개 30~50% 사이이며, 지역이나 제조 방식에 따라 그 맛과 특징이 다릅니다. 아락은 단지 음료가 아니라, 힌두교 의례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쓰이기도 하며, 혼례, 생일, 추수 감사 등의 문화 행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발리에서 만난 현지인은 “아락은 피 같은 거야. 의식 없이 아락 없이 살 수 없어.”라고 말하더군요. 단순한 술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말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아락을 활용한 프리미엄 브랜드와 칵테일 문화도 형성되고 있으며,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시음 체험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 되도록이면 정식 유통 제품만 구입하거나 바에서 마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술 한 잔에 담긴 땅과 사람의 이야기

동남아 전통주는 대부분이 농사와 계절, 지역 사회의 리듬과 함께 만들어져 왔고, 그 술을 마시는 방식에도 그 지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태국의 강렬한 라오카오, 라오스의 따뜻한 라오라오, 미얀마의 시큼하고 순한 타운예, 베트남의 공동체적 루우쩌, 발리의 신성한 아락 발리까지. 이 술들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지역의 삶과 이야기를 담은 문화의 일부입니다. 만약 언젠가 그 술 한 잔을 마실 기회가 생긴다면 그 술이 만들어진 땅과 사람들을 함께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